겨울방학 연구실 근처 완벽 원룸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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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장비 점검 프로젝트 때문에 이번 겨울방학을 통째로 서울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통학 시간이 왕복 세 시간이라 평소엔 강행군도 견디지만, 야간 실험이 이어지는 방학에는 집이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 주변 단기 임대 방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문제는 방학 시즌이라 월세가 치솟았다는 점이었고, 단기 계약이라고 가격을 덜 받아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주말 새벽, 자취 카페에서 우연히 매물 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학교 정문에서 도보 7분, 가전 풀옵션,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25만 원. 사진에는 최근에 리모델링한 듯한 흰색 싱크대와 새 매트리스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글쓴이는 급하게 지방 근무 발령이 났다면서 빈 방이 아까워 학생에게만 할인한다는 설명을 달았습니다. 댓글에는 관심 표현이 몇 건 있었지만, 아직 계약 완료 표시가 없었습니다. 저는 바로 쪽지를 보냈습니다.

답장은 부드럽고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작성자는 회사 기숙사에 입주하려면 사흘 안에 짐을 정리해야 해서, 방문 날짜를 넉넉히 잡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신 방 상태를 보여 주겠다며 짧은 영상을 전송했습니다. 내용은 거실을 한 바퀴 도는 단순한 컷이었지만, 벽지와 바닥이 흠집 없이 깨끗해 보였습니다. 저는 혹시 몰라 실물 확인을 원한다고 했지만, 상대는 현재 자가 격리 중이라 대면이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약 의사가 있으면 오늘 안에 보증금만 이체하면 예약을 확정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계좌번호를 받아 적는 순간, 작은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예금주가 개인 이름이 아닌 영어 이니셜이었고, 은행은 잘 쓰이지 않는 인터넷 전문은행이었습니다. 제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작성자는 실거주 사진 여러 장과 주민등록증 옆면 사진을 보내며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주민등록증 사진의 해상도가 지나치게 높았는데, 빛 반사가 없는 걸 보고 스캔본이 아니라 이미지 편집물일 가능성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려던 차에 친구가 연락해 왔습니다. 온라인 사기 의심 사례를 모아 둔 커뮤니티인 먹튀위크에서 방 구하기 사연을 종종 확인해 보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저는 계좌번호 뒷자리와 닉네임 일부를 검색창에 넣었습니다. 결과 페이지 상단에 낯익은 방 사진이 달린 신고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 달 전 올렸던 글쓴이가 같은 영상과 같은 설명을 활용해 여러 지역에서 단기 임대 공고를 반복했으며, 보증금만 받고 연락을 끊었다는 피해 사례가 상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댓글에는 실제 피해자들이 남긴 이체 내역과 똑같은 예금주 이니셜이 첨부돼 있었습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영상이 단 한 번 촬영된 뒤 계속 재사용된 것이었고, 주민등록증 사진도 포토샵으로 제작된 가짜였습니다. 저는 바로 쪽지를 닫고 추가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게시글을 캡처해 카페 관리자에게 신고하면서, 다른 이용자들이 같은 계좌로 입금하지 않도록 주의 공지를 부탁드렸습니다. 이후 몇 시간 만에 문제 글은 삭제되고 작성자 계정도 정지됐다는 알림이 올라왔습니다.

방은 결국 학교 앞 게스트하우스 장기 요금으로 구했습니다. 하루 숙박비로 계산하면 원룸보다 조금 비싸지만, 보증금 없이 카드 결제만으로 계약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실물 확인을 마친 뒤 결정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사 첫날 창문을 열어 두니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지만, 보증금을 날릴 뻔한 기억 덕분에 오히려 따뜻한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돌아보면 급박한 일정과 낮은 가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나타났을 때, 저는 냉정을 잃을 뻔했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매물을 만나면 우선 입주 날짜가 촉박한 이유, 예금주 정보, 그리고 간단한 검색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존 피해 사례를 먼저 살피기로 다짐했습니다. 먹튀위크 검색에 들인 1분이 제 생활비 한 달치를 지켜 준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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